제밍글스

벌초 13화

관리자
2025.04.12 추천 0 댓글 0

벌초 13화

 

귀찮다.

여자들이란...

하필이면 나의 유일한 학교친구가 여자라는 것도.. 짜증나는 현실이다.

잔뜩 삐졌는지.. [현주]가 갑자기 나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정문쪽을 향해 내닫기 시작해 버린다.

[현주]가 저멀리 한점이 되어 사라져 버린다.

빠른 걸음으로 가다가 다시 뒤돌아볼 줄 알았는데.. 진짜 가버린다.

어이가 없다.

"체... 무슨 내가 지 애인이라도 돼??....."

사실.. 오늘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 이후 교양과목시간까지 공강을 때우기 위해 

빈강의실에서 레포트를 정리하다 복도쪽에서 우리과의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복학생 

형과 히히낙낙 농담을 주고받는 [현주]를 보게 되었다.

나와는 달리 2학기에 들어와서 많은 학우들에게 말도 많아지고 붙힘성도 좋아진 [현주]였기에 

이런 광경은 아무일도 아닐 수 있었는데.. 왠지 내 기분이 언짢아 진것이었다.

[현주]는 지난 여름의 인연을 나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쉽게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어쩌면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긴 한데..

문제는 나의 닫혀진 가슴 때문이다.

그리고 [현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의 얼어버린 가슴은 결코 열리지 않을것만 같았다.

어쩌면 내 착각이 아니라면...지금 [현주]와 나의 아리송한 신경전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함평으로 향하는 기차에 혼자 몸을 실고 큰집으로 향한다.

고3인 [현준]이 녀석은 가지 않았고.. 이번에도 아버지는 바쁜 회사일 핑계로 가시지 않으셨다.

올겨울에 결혼한다는 [석준]이형과 예비신부인 형수님과 [민준]이형.. 그리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야아... 희주이... 징~허게 오랜만이다이??..."

"하하.. 석준이형..민준이형.. 오랜만이야.."

"여어~ 우리 서울 동상와부렀는감???...."

"큰엄마.. 큰아버지.. 잘 계셨어요???..."

"아야.. 욕봐부렀구마이... 점심 묵어야제??..."

"시방.. 야가 누구여??... 동석이네 막둥이여??..."

"하하.. 큰아버지.. 저 희준이에요..."

"어...... 희준이다냐..허허..짜석..그려..먼길오느라 고생 많었따......"

큰아버지는 작년보다 훨씬 더 건강이 쇠약해지신것 같아 보인다.

늦은 점심을 먹고 큰집 형들과 벌초의 산행길을 나섰다.

이웃동네의 험준한 산길을 따라올라 산 중턱에 있는 조상님의 묘소를 벌초하고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따라 월천리의 큰집으로 향하는 경운기를 타고 왔다.

큰집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 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민서]누나 얘기가 밥상위에 오른 것이었다.

"아 글씨... 신안에 산다든.. 민서 어매 말이여라..."

"..응......"

"거.. 학산 진갑이네 어매가 그집구석 이웃헌테 들었다든디.. 민서 갸가 올봄에..

무신.. 병원으로 요양을 가부렀다고 않혀요???.."

"...!!!!!!!!!........."

순간.. 밥숟가락을 입에 문채.. 얼어 버렸다.

서둘러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대화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민서..갸가.. 목포에서 즈그 이모네 가게서.. 그 머시냐.. 미용한다 그러지 않았는감???.."

"하이고... 나이도 어린거시.. 지보다 더 어린놈이랑.. 연애질허다 즈그 어매한테 딱걸려서 

그일도 못허고.. 신안으로 끌려갔다 안그랬소??..."

"그려??... 어허.... 참...."

"근디.. 그것이..쪼까.. 수상한것이.. 민서 갸가 아픈디도 없는디.. 즈그어매랑 허구헌날

대판 싸우불고 그냥 뛰쳐나가분것을 그라곰.. 이웃덜한테 야그한단 말이여라.."

"그..말만한 간내가.. 즈그어매속을 썩혀부렀구만..."

"그라게말이여라.. 재준이 그눔.. 정신채려불고.. 광주가서 공부잘헌다는디.. 이번에는

다큰년이 그런다니께..."

"우리 김가네 색기덜인디... 나가 몸좀 추수리믄.. 신안으로 가봐야 쓰겄구만..."

"하이구.. 이냥반이... 지금은 남의 색기나 마찬가지제.. 퍽이나 반기겄소..."

"이사람이..!!... 갸들이 왜 남의 색기여??... 동춘이 자석들... 우리 김가네 색기들이제!!..."

"허이고...그놈의 씨종자타령은...싸게 밥이나 드쇼....희준이 많이 묵어라이...??..."

"................."

큰집의 두 브라더스와 예비 형수님은 저녁먹기가 무섭게 간만에 찾은 고향동네의 옛친구들을 

만나러 손불로 달아나 버렸고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큰집 뒷 담벼락을 지나 고추밭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추밭 언덕위 쓸쓸히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담배를

꼬나 물었다. 

어느덧 어둠이 서서히 밀려와 저멀리에 있는 앞산과 저수지를 덮어가고 있다.

하얀 담배연기가 검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팔베개를 하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김.....민...서....]

아까.. 큰집에 올 때 부터.. 아니.. 엊그제 큰집으로 벌초하러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당부를 들었을 때 부터.. 조금씩 차오르던.. 알수없는 그 무언가가..

이제는 가득차.. 부풀어오른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그건 [민서]누나에 대한 그리움이었나 보다.

"민서........ 김민서......."

조용히 혼잣말로 [민서]누나의 이름을 불러본다.

긴 생머리칼에.. 짙은 눈썹.. 쌍거풀진 커다란 두눈과 나를 바라보며 짓는 아름다운 미소의

보조개와 덧니..

새하얀 알몸.... 길다란 허벅지와 탱글한 피붓결..

저녁 밥숟가락을 입에 물고 전해 들은 [민서]누나의 행방 때문에.. 지금 복잡미묘한 이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작은엄마랑 대판 싸우고 뛰쳐나갔는데.. 작은엄마는 이웃들에게 아파서 병원으로 

요양을 갔다고 둘러댄다??....'

혹시 진짜 어디가 많이 아픈건지.. 그것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새.. 피워물던 담배가 필터를 태우고 있다.

도대체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

작은어머니 댁에서 뛰쳐 나갔다면.. 당연히 나에게 연락을 했어야만 하는게 아니었을까??..

어찌 이리도 무심할 수가 있는건지..

너무 보고싶다.

그리고 너무 사랑했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깜깜한 밤하늘에 하현달이 떠올라 외로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전.. 나와 [민서]누나의 밀애를 훔쳐보던 그 달이었다.

"씨발.. 넌 아냐?? 김민서가 어디 있는지??..."

"알지??... 그치??...."

"우리 써니한테..전해줘... 미치도록 보고싶다고... 사랑한다고..."

미친놈처럼 달을 보고 독백을 하고 있으려니.. 왠지 감정이 복받쳐오르는듯.. 눈물이 나려한다.

하지만.. 감정을 어거지로 꿀꺽 씹어삼키며.. 마저 독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함께 있을 때.. 잘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군대가기전에 꼭.. 보고 싶었는데...씨발..."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쓸어 닦았다.

돌고 돌아.. [민서]누나와 함께 했던.. 이곳으로 오고야 말았는데..

나 혼자만 씁쓸히.. 저 달을 바라보며 연기연습을 하고 있다니..!!...

마치 뫼뷔우스의 띠처럼.. 이 지랄 같은 운명의 길을 따라 한바퀴를 돌아 이곳으로 다시 왔건만.. 

뒤집혀진 운명의 장난으로... 정작 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혼자 와있는듯한 기분이다.

[민서]누나와 내가 지금 서로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버렸고 한바퀴를 돌아 언젠가..

먼훗날 일지언정 원점에 도착하면 우리의 만남과 사랑이 이루어 질꺼라 믿었건만....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도 못한채.. 이 지랄같은 운명의 띠 위에서 쳇바퀴를 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원히... 

그렇게 상경한 후 일주일간은 오로지 [민서]누나 생각밖에 아무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강의실 칠판을 보고 있어도..

이제는 제법 나에게 시큰둥하고.. 학과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하는 [현주]의 표정을 

보고 있어도..

전공서적안 난해한 증명문제를 파고 있어도..

[김민서]가 말한 정신병이 이런거였을까???

그당시 [김민서]는 지금 나와 같은 이런 기분을 겪었단 말인가??

그당시 다시 쓰나미처럼 나를 덮쳐버린 [김민서]의 향수는 꽤 오랫동안 내 가슴에 상처를

남겨버렸다.

단지.. 벌초를 다녀왔을 뿐이었고.. 그 곳에서 [민서]누나의 소식을 듣고.. 뼈아픈 우리 운명에 대해

생각했던 것 뿐인데.. 몇해동안 그리워했던 속앓이를 몽땅 다 합친것 이상의 기분을 겪게 될 줄이야..

하지만.. 몰입해 버리는 공부와 학교생활로 그나마 [김민서]의 쓰나미를 어거지로 잠재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어느덧 종강파티의 술자리에 참석했다.

우리학과의 남학생들중 많은수가 이번에 나처럼 군대에 입대하기 때문에 지금의 종강파티는

이땅에 태어난 불쌍한 예비 군바리들을 위한 송별파티의 성격도 있긴 하다.

[현주]는 인기가 좋아 이자리 저자리를 넘나들며 친해진 학우들과 질펀한 술자리에서 히히낙낙 

거리고 있었고.. 불편한 자리에 앉아있는 나는 그저 내 앞의 피쳐를 맥주잔에 따라 벌컥벌컥.. 

들이키며 알 수 없는 갈증을 해소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자리가 그동안 나와 2년간 함께했던 이들과의 어쩌면 마지막 술자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이학교에 와서 우리과 학우들과 어울리지 않고 내안에 나를 가둬

버린채.. 이기적으로만 살아왔던 내 자신이 무척.. 바보스러워 보였다.

'오늘 하루만큼은... 옛날의 나로.. 돌아가 보자... 억지로라도....어차피... 마지막이니까....'

우리과의 [지연]이가 어느덧 내 옆에 앉아 옆쪽의 학우들과 떠들어대고 있었다.

한때 과대놈이랑 연문설이 나돌고 우리과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이쁘장한 여자애였다.

나와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마음을 비우고.. 모든 학우들에게

개방적인 마인드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는..나와 지금의 술자리에서 친해지는 중이다.

"올~ 희준이.. 너.. 무지하게 소심하고 조용한 앤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안그러네??..."

"훗...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거겠지.. 자.. 마시자...!!..."

"짠!!...근데.. 있잖아.."

"..벌컥..벌컥......응..."

"뭐 물어볼께 있는데...."

"........."

[지연]이가 내 귀에 입을 댄채.. 간지러운 몇마디를 내귀에 집어넣는다.

"너랑..현주랑..씨씨야??..."

"........................."

웃음을 머금고 [지연]이의 목을 잡아 끌어 향긋한 샴푸향이 그윽한 [지연]이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아니...."

"........"

순간.. 내 맞은편의 [현주]와 눈이 마주쳤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듯.. [현주]의 눈길을 피한채 2년만에 처음 나누는 나와의 대화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잔뜩 미소를 머금은 [지연]이와 마주보고 있다.

"진짜..씨씨 아니야?? 놀러도 같이 갔다며??.. 동해안으로..."

"..........."

"놀러간건 사실인데.. 아무일도 없이 그냥 놀러만 간거뿐이야.. 그냥 친구일 뿐이니까.."

"..........."

"훗.. 근데 다들 니네 씨씨로 알고 있는데??..."

"............"

"절대 아냐.. 나랑 쟤랑 아웃사이더 아니냐.. 그러다 보니.. 외로운 놈들끼리 우정에 목말라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그렇게 보인거였겠지..."

"큭큭!!.....푸하하하..!!!!!...."

갑자기 내 귓속말을 전해 들은 [지연]이가 배꼽이 빠질만큼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주변의 학우들이 [뭔데??] 하며 [지연]이에게 기웃거렸고.. 맞은편 [현주]는 왠지 

나와 자신을 쳐다보며.. 미친듯 웃어대는 [지연]이의 태도가 불쾌스럽다는 표정을 나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을 절대 말하지는 않았으니.. 찔리는게 없으니까 술자리에서는

[현주]의 불만어린 눈빛을 애써 무시해 버렸다.

술자리가 바뀌고.. 2차..3차..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가며 우리과의 인원들이 쪼개졌다.

어느덧 3차까지 ?아온 충무로의 술자리에서 술에 만취해 [지연]이의 허벅지를 배게삼아 

자빠져 있었다.

마치.. 오래전 [민서]누나의 허벅지위에 머리를 배고 누워있던 생각이 든다.

눈을 감으니 소르르.. 잠이 올 지경이다.

"호호... 쟤 뭐냐??...."

"..불쌍하잖아.. 다음달 군대가는데..."

"군대가면 다야??.. 항상 붙어다니는 지 애인 어디다 두고 니허벅지위냐??.."

"현주..얘랑 씨씨아니래..."

"훗.... 깨졌겠지.. 아까도 같이 안앉아 있더만.. 요근래 깨진거 같애.. 셤보기 보름전부터...."

"호호.. 별걸 다 관찰했다??.."

지금 내가 술에 취해있는건 분명한데.. 도무지 몸을 가눌 수도 없고..

그렇게 혼줄을 놓아버렸는지.. 어느덧 꽤 시간이 지난듯 한데.. 문득 써늘함에 잠이깨어 

눈을 뜨니.. 학교 벤취에 길게 누워 잠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현주]가 잔뜩 못마땅하고.. 피곤한 표정으로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상체를 일으키며.. 모가지를 벅벅.. 긁으며 [현주]에게 입을 열었다.

"흐음....흠!!.... 후우... 씨이... 머야??... 학교네??..."

"............ 이제야 깼냐??..."

"내가 왜 여기있지??...흐음!!... 어후.. 목말라..."

"으휴.. 이화상아!!... 내가 증말.. 쪽팔려서.. 못살아요.. 너때문에.."

"내가.. 왜???...."

"너 진짜.. 아무기억 안나??..."

"응.... 뭐가??..."

"김민서가 도대체 누구냐???...."

"뭐????......"

"...현주는 친구일 뿐이고... 김민서가 내애인이라고... 주절주절.. 훗!!... 웃겨서.."

".......씨바....."

"니가 그렇게 오바 안떨어도.. 니랑 나랑 아무것도 아닌거 알만한 사람들 다 알거든????..."

"....흠냐..흠냐......."

".......근데...김민서가 누구냐??...."

"그냥..뭐... 옛날 첫사랑..."

"하이고~ 하여간 보여줄껀 다 보여주네..꼴에??.. 빨랑 가자!!..너때문에 피곤해 쓰러지겠다..."

그렇게해서 군대가기전까지의 나의 대학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입대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휴학계를 내러 학교로 갔다가.. 우리과의 복학생 형과

다정히 교정을 걷고 있는 [현주]를 발견했다.

팔짱만 안꼈지.. 이건 누가봐도.. 보통사이가 아닌듯.. 천천히 나란히 붙어 상록원 건물옆을 지나

남산으로 향하는 교정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척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떠난 후 혼자 남겨져야 할 [현주]를 더이상 비난할 이유도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군입대를 앞둔 며칠전..

학교에서 [현주]를 만났다.

첫눈이 올듯 말듯.. 무겁기만 한 겨울날씨에.. 방학인데도 도서관 주변에는 학우들이

꽤 많았다.

명진관앞 쓸쓸히 멈춰선 분수대에 앉아 팔정도의 부처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 여름 저 팔정도의 부처의 가르침으로 나와 첫경험을 했던 긴머리의 [현주]가 길다란 

롱부츠에 도톰한 코트차림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차분한 눈빛과 하얀얼굴에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코끝이 약간 빨간게 귀엽게 느껴졌다.

우리는 남산으로 향했다.

[군대가기전에 남산타워나 올라갔다 오자].. 라는 말에 [현주]는 헥헥 거려도 싫은 내색없이

수많은 계단을 걸어올라 결국 남산타워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남산타워 아래..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서 [현주]와 나란히 서서 한강을

바라다 보고 있다.

"그동안.. 최현주.. 참 고마웠다...내옆에 있어줘서.." 

"나도...."

"2학년에 올라.. 너때문에 많이 잼있었어.."

"치... 그말 하려구 나오라고 하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거야??..."

"밥도 한끼 하고.. 이따.. 해떨어지면 술도 한잔 하구..."

"이따 나 저녁때 학교앞에서 약속 있는데??....."

"그래??..."

"짜식.. 진작 얘기 해야지.. 이누님이 요즘 바쁜거 알잖아..."

"그래 그럼...하는수 없지... 밥이나 먹고 말아야지.. 대신 맛있는거 먹자.. 마지막이니까....."

"............"

[현주]가 왠지 못마땅하고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약속 미루고 오늘 한잔 하자고 말하면... 그게 어디가 그렇게 덧나냐??.."

"...????....."

"아님.. 혹시.. 빈말로 한잔 하자고 한거였냐??.."

"치....갑자기..왜.. 시비야??..."

"됐다..김희준...그동안 너에 대해 무척 못마땅하고.. 이해못하고 있었던게 무척 많았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

갑자기 [현주]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서둘러 눈물을 훔치더니 억지 웃음을 짓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나쁜놈... 치히~...흐음... 하여간.. 몸 건강해.. 어디 다치지나 말구..."

"..............그래... 미안해....."

"흑흑!!...바보.. 니가 왜 미안해에??...나 걱정마.. 히히...흐음!!.. 난 니보다 더 친구들

많잖아..."

"..훗......."

"치히... 니 군대가면 심심해질까봐.. 열심히 사귀어뒀으니까.. 걱정말구..."

"..........."

우리는 그렇게 점심을 하고.. 정든 학교 교정을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이별의 시간이 와버렸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웃음을 머금은 채..

누가 먼저 제안도 하지 않았지만.. 살포시 서로를 껴안아버렸다.

그리고 서둘러 떨어지며 표정관리에 힘쓰며 헤어지게 되었다.

[잘가..][편지꼭해..]라는 말을 주고받은 후.. 갑자기 뒤로돌아버린 채..

저멀리 멀어지는 [현주]의 뒷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며.. [최현주]!! 라며 힘껏 부르고 싶은 목청을 억지로 눌러 

결국 [현주]를 불러세우지는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못보게 될 얼굴.. [최현주]..

만약 내 가슴에 [김민서]라는 대못으로 긁힌 상처만 없었더라도..

절대 놓칠 수 없는 여자였는데..

그동안 얼어붙은 내옆을 지키며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하지만 상처는 상처만 퍼트릴 뿐..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나는 결코 누군가를 사랑해서도.. 

그 사랑으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입어서도 안돼는 일이었다. 

그것도 소중한 친구인 [현주]에게는 더욱더....

그날밤..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진탕 술을 퍼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숙취로 괴로워하고 있는 내 방문을 [현준]이 녀석이 빼꼼히 열며 머리를 내 밀었다.

"머야....."

"형!!.. 민서누나 있는데 가르쳐 줄께.. 군대가서 편지해!!....."

순간... 눈에서 불똥이 튀는듯 모든 숙취가 확!! 달아나 버렸다.

"뭐???......"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번지 **미용실..."

"야!!..너!!..."

"나 학원가야해!!.. 빠이!!!!....."

[쾅!!]

명문대 본고사를 준비하는 [현준]이 녀석이 뛰쳐나간 후... 서둘러 책상위로 가서

자칭 아이큐150의 천재인 [현준]이 녀석이 내뱉은 주소를 받아적었다.

"광주..광산..송정동에.. ***-**.. ** 미용실??..."

다음날..

논산훈련소의 입대전날.. 가족들과 마지막 아침식사를 한 후 눈시울을 붉히는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 집을 나선 후 서둘러 광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 올랐다.

[김민서]..

그저 두눈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만 싶었다.

건강하게만 있어준다면... 그 이상도 바라지않겠다는 심정이었다.

군대가기전 꼭 한번은 보고 싶다는 내 작은 소원을 시골밤에 뜬 하현달에게 말했던게 

이루어졌다는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현준]이 녀석은 도대체 [민서]누나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냈는지..참 기특한 녀석이다.

오후세시쯤.. 도착한 광주에서 무작정 택시에 올라 주소지를 보여주었다.

내일 오후 한시까지.. 논산 훈련소로 입소해야 한다는 부담에 슬슬 애가 닳는듯한 심정이다.

택시가 광주의 송정동 일대를 돌더니.. 결국 [민서]누나가 일한다는 미용실앞에 멈춰섰다.

"여그가 맞네요이... 미용실 이름도 그라고..."

"수고하셨어요... 얼마에요??..."

택시가 출발하고.. 통창안의 미용실 내부를 들여다 본다.

대여섯명의 손님과 분주한 손길의 미용사들이 보인다.

유독.. 큰키에.. 길다란 파마머리..

앞머리를 위로 올려 핀으로 꽂아 고정시킨 채.. 중학생으로 보이는 꼬맹이의 스포츠 머리를 

다듬고 있는 여자가 눈에 보인다.

[김민서]...

'..결국.. 신안에서 작은어머니와 살다가 뛰쳐나와 이곳까지 왔구나..'

[민서]누나가 스포츠 머리의 중학생을 샴푸실로 데려가 머리를 감긴다.

'이젠 됐다..그냥..가자... 건강하게 잘 있는걸 보니.. 안심이다...'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서로 얼굴은 봐야지...'

'민서누나를 만나겠다고??? 니가 지금 제정신이야???...'

'뭐가 어때??? 니가 사랑하는 김민서잖아!!.. 가까이 가서 똑바로 보란 말야!!.. 그리고

군대 가버리겠다고 전해주란 말이야!!!...'

[민서]누나의 가게 앞에서.. 내안의 또다른 자아들이 미친듯.. 싸워대고 있다.

복잡한 심경에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가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딸랑~]

"어서오세요.."

"어서오세......!!..."

[민서]누나가 나를 보더니 두눈이 휘동그레 해지며... 얼어버렸다.

왠지 초췌하고 아픈듯해 보이는.. 너무나도 하얀 얼굴..

하지만.. 크게 걱정했던 것과는 다른 것 같다.

병원에 없다는걸 두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아무말없이 [민서]누나의 두눈빛을 지나쳐.. [민서]누나가 서있는 거울앞.. 경대의자에 앉았다.

다른 미용사가 내 뒤로 오려하자.. [민서]누나가 자기가 받겠다며 내 뒤에 선다.

내앞의 경대속에는 뭔가에 잔뜩.. 화가난 내 얼굴과.. 놀란 가슴을 추스리는듯한 [민서]누나가

애써 태연한 척 무표정한 얼굴로 무거운 카바를 뒤집어 씌워버린다.

".... 저중학생 머리처럼.. 깎아주세요... 군대 가야 하니까..."

".................."

경대속 [민서]누나의 떨리는 눈빛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대뜸..[민서]누나가 큰소리로 입을 연다.

"너... 언제 군대 가냐????..."

".........내일..."

모기만한 내 목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자 마자.. 요란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웨에엥].....

[민서]누나의 손에 잡힌 머리빗 밖으로 삐져나온 머릿칼이 바리깡으로 밀려 사정없이 깎여버린다.

마치.. 큰집 뒷산의 조상님 묘소를 예초기로 벌초할 때.. 제멋대로 자라던 잡초들이 깨끗히

깎여나가듯..

아래로 떨군 시선을 경대속으로 천천히 올려다 보았다.

[민서]누나는 무표정하고 싸늘한 얼굴로.. 온통 머리를 밀어재끼는데 정신을 쏟고 있는듯

누나의 얼굴을 살피는 내 눈빛은 의식하지 않아보인다.

"그냥.. 군대 가기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 왔어.."

"......................."

[웨에엥]......

바리깡 소리만 요란하다.

아무 대답도 없는 [민서]누나..

괜히 입을 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덧.. 머리가 홀라당.. 깎이고.. 아까 [민서]누나가 머리를 다듬어 주었던 그 중학생처럼

짧은 스포츠 머리가 되어 버렸다.

경대속.. 내 머리를 보며 어색한 기분에 빠져들기가 무섭게 [민서]누나의 손에 이끌려

샴푸를 했다.

내 두피를 벅벅.. 긁어대며 샴푸를 하는 [민서]누나의 손길은 

왠지 손톱끝이 뾰족하고 강한힘이 느껴졌다.

머리를 말린 후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 째킴?. 이제는..'

[민서]누나가 아프지 않고.. 이렇게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걸 두눈으로

확인 했으니.. 다행이다.

나는 이제.. 맘편하게 군대에 갈 수가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시원해진 머리에.. 정신이 확 돌 정도로 상쾌한 기분이다.

입양전야에 어울리지 않는 싱글벙글한.. 기분이란..

서둘러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막차를 타고 논산 연무대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이다.

"희준아!!!!....."

뒤에서 [민서]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바.. 그냥 좀 가게 해주지...'

무겁게 뒤를 돌아보았다.

[민서]누나가 미친듯.. 달려들어 나를 껴안아 버린다.

"뭐덜려고... 여그까지...왔어!!!..이 씨이!!!!...이 씨이!!!!..흑흑흑!!!!!...."

"그냥.. 누나 아프단 얘기를 잘못 주워들어서... 그냥.. 멀쩡한지만 보려고...."

"뭐???....흑흑..."

"훗... 우리 써니.. 얼굴 보니까.. 피곤해 보이긴 한데... 멀쩡한거 같아 다행이네.."

"씨이!!!....으흑흑흑!!!!...."

"이제 됐어.. 맘 편하게 군대 갈 수 있어.. 됐어.. 누나.. 들어가..."

[민서]누나는 긴팔로 내 목을 감은채 놓지를 않고 울고만 있었다.

"이..병신!!!.. 나쁜놈!!!.. 니만 만 편하면 돼야?????...."

"..........."

군대가기전 마지막이었던 [민서]누나의 그 모습..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버린..

하필이면 그런 얼굴이었다는게 참.. 안타깝기만 하다.

이뻣던 [민서]누나의 얼굴이 영원히 각인되었어야만 했는데 말이다.

"누나... 나.. 가야 해..."

"흑흑.....내일가믄 안돼??...."

"아냐.. 그냥 지금 가는게 좋을 꺼 같아.."

"씨이!!!......으흑흑흑!!!!...으흑흑흑흑!!!!..."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를 껴안고 울고만 있는 [민서]누나때문에

그냥 밖에서 얼굴만 보고 갈껄 그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잘 지내고 있는 [민서]누나의 삶에 또다시 나타나.. [민서]누나를 힘들게 하는게

분명하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철없던 그 시절..

그저 내입장에서 나만 좋으면 그게 다인줄 알았던.. 그 때..

나를 만나 무척이나 아파하던 [민서]누나를 보고.. 그렇게

[민서]누나를 영원히 떠나버리기로 결정을 해버렸다.

1년후..

강원도 양구의 **사단 일명 백두산 부대..

엊그제 진급하여 가슴에 새로 새겨진 상병계급장과 함께 사단직할 수색대대의 군생활도 

이젠 제법 익숙할 만 한데..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수색과 매복 작전은 여전히 긴장의 연속이다.

우리 부대는 전시가 되면 타부대와는 달리 적지로 침투하여 첩보수집과 폭격유도등의 기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백두산 부대내의 최정예 대대이다.

그러다 보니 훈련도 많고 군기도 쎄고.. [다들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네~]라고는 하지만

후방에서 훈련을 받을 때나.. 요즘처럼 GP에서 작전중일 때는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날.. 이른아침 매복작전에서 철수하고 소초로 돌아왔을 때 였다.

부소초장의 호출이 있었다.

".....김상병.. 니가 왠일이냐???...."

"..하하...왜그러십니까??..."

"짜잔!!!....."

"어엇!!!!!..."

장난끼 가득한 부소초장의 손에는 나에게 온 편지가 있었던 것이었다..

겉봉 발신자는 분명... [써니]

부소초장의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아 들고.. 미친듯.. 뛰쳐나와 소초 뒤 담벼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민서]누나에게 군입대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내주었을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편지지를 조심스레 끄집어 읽는다.

----------------------------------------------------------------

TO : 희준

오빠 오랜만이야.

나야 써니..

그동안 힘든 군생활 하느라 무척 고생 많았겠다.

요즘 날씨도 추운데 오빠가 있는 전방쪽은 더 춥겠지?

희준오빠.. 너무 보고싶어.

오빠랑 그렇게 헤어지고나서 지금껏 단 하루도 오빠생각을 안한적 없어.

보고싶어.

보고싶어 미치겠단 말이야.

어제는 오빠 생각하면서 많이 울었어..

그런데 지금도 막 눈물이 나오려고 해..

이럴줄 알았으면 오빠 군대가기전에 자주 연락해서 많이많이 만났어야

했는데..

휴가 나오면 꼭 찾아와줘.. 부탁해 오빠..

그리고 꼭 편지좀 보내줘..

나 지금도 눈물 흘리며 편지를 쓰는거야. 

바보처럼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미치도록..

1996. 12 써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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